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승리함으로써 청나라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선은 일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일전쟁 직후 삼국 간섭 때부터 등장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이 이와 같이 배일친러정책을 표방하자, 일제로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일전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 · 미의 지지 하에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한국주차헌병대
일제 헌병의 조선 주둔은 1896년 1월 25일의 임시헌병대 181명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03년 12월 1일에 임시헌병대를 주차헌병대로 개칭하면서 주차대사령관 휘하로 들어갔다. 헌병대장 시카야 대위 밑에서 군사경찰과 철도,전신을 경비하였다.
이후 1904년 3월 11일에 주차군 예하부대로서의 ‘한국주차헌병대’의 편성을 명령받았다. 그 편성은 대장 다카야마(高山逸明)소좌 밑에 위관급 이하 총원 329명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 20일에 주차군사령관 하라구치(原口庚濟)가 함경도에 군정을 시행하고, 鏡城 및 부근 일원에 헌병치안경찰제를 실시하자 철도·전신 경비 외에 치안경찰 업무도 맡게 되었다.
실행 과정
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했습니다.
통신권 장악: 1905년 4월, '한일통신기관협정'을 맺어 우편, 전신, 전화 등 통신권을 빼앗았습니다.
국제적 승인 획득: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 9월 포츠머스조약 으로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았습니다.
경찰권 장악: 1907년 10월 한국 경찰을 일제 경찰에 통합시켰고, 1910년 6월에는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