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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를 심문하는 등 이견의 여지가 없는 유명한 친일파

by 나는기사가진컴맹 2024. 11. 21.

김씨 성을 가진 여자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김윤정

이런 친일파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전라남도 참여관
경기도 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하였는데, 친일파 청산이 안됐던 이유도 여기 있으리라... 이 당시

남한의 기득권들이 지금 들고 일어나나부다... 당시의 후손들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그해 귀국했다.

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당시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는 이재정이었고 김윤정은 인천부 경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908년 3월 해항 신상회사 사원들과 미상회사 사원들 및 지사 강준, 정재홍, 한우근 등과 인천 지역의 유지들이 공동으로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려 하자 흔쾌히 동의하여 인천공립보통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관직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후 관립인천실업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가 1910년 10월의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사직하였다.

그러나 1910년 11월 개화파 친일 관료로서 등용되어 조선총독부의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인 윤건중의 습격을 받았다. 윤건중은 행사에 참석한 김윤정을 살해하려다가 그가 재빨리 단상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수배당하였다.

1921년 3월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10월 정기인사에서 다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경기도 내 군수 30여명을 인솔하여 참여관-군수 시찰단의 한사람으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1925년 4월 2일에는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고등관 2등 충청북도지사, 곧이어 고등관 1등으로 승급한 뒤 이듬해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 설립이 추진되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928년 1월 15일 조선여자직업사 대표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추원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 1937년 8월 방응모, 한상룡, 박흥식 등과 함께 애국금차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윤치오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이라는 설이 있는 윤고려가 김윤정의 딸이다. 윤고려는 본래 김씨이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940년 10월 전시 황민화정책 시행 당시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국민의용대 고문 등 각종 단체에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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