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4월 16일, 일본의 강요로 대한제국군 감축이 이루어졌습니다
- 친위대가 해산되었습니다.
- 시위대와 진위대가 감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는 일본의 전략적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1907년의 전면적인 군대 해산의 전조였습니다.
일본은 만주에서 계속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 열강으로부터의 동의를 얻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인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02년 1차 영일동맹에서 약속하였던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없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동의받았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지배의 걸림돌이었던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배제시킨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한반도 침략 프로젝트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친위대 해산의 배경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이후 정미칠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여러 권한을 빼앗았습니다.
해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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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병들에게는 훈련원에서 도수교련(徒手敎練)을 한다고 속이고, 각 부대 장교와 일본 교관의 인솔 아래 맨손으로 훈련원에 모이게 했습니다
- 제1연대 제3대대와 제2연대 제3대대 등 평소 배일 성향이 강했던 부대들도 집합했습니다
군인들의 저항
해산 소식을 들은 군인들은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 7월 19일, 고종 퇴위를 반대하는 시위에 제1연대 제3대대 소속 무장 군인 약 100명이 참여하여 일본 경찰 및 상인들과 충돌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일본은 군대 해산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해산의 영향
-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의미하는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 해산된 각지의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참가하면서 항일 무장 투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 이는 대한제국 군대가 식민지 군대의 제약을 벗어나 민족적 이해에 눈을 뜬 애국적 군대로 변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친위대 해산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으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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