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동에 문효중 박사라고 있어요, 그 유명한 부산의 피부 비 그 선생이었던 그 학교다. 이제 그, 저, 그 시험 치고 난 뒤 이제 대학을 기다리면서 그제 치료한다고 이렇게 가는데, 문 박사는 문 박사 대여 오면은 "야, 지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 지금 어떻게 돼 있어?" 지금 밖에 그때 당시에 이미 난리가 났었어요. 음, 근데 우리는 사복을 입고 다니면 큰일나요. 음, 왜냐하면, 아, 사복 입고 나가면 개군이 내가 군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그래, 내 군복을 항상 입는 거예요, 군복을. 문 박사님, 지금 현재 사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뭐 약간 그런 와중에도 그 문 박사 병원으로 아들이 두드려 맞고 막 피해 들어오면은 그 문효중 박사가 참 의식 있는 그 의사님 있더라고요. 그 충무 지금은 나이가 이제 뭐 아주 오래돼서 병원 그만 두셨을 거예요. 그분이 문을 열어 주더라고, 병문 들어가서 병문 장갑 보더라고.
그냥 그러니까 학생들이 막 그 들어와서 다서 있으면 체 맞고 그러고 막 있으면은 목사가 제가 시설 라 그러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나는 문현영 박사님이 아, 정말 참 훌륭하신 분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음, 그러면 충무동에서 이제 버스를 타고 이제 그때 지하철을 탈 때니까 이제 올라 온단 말입니다.
저 18번, 19번 타면은 그 온천까지 오니까. 음, 그러면 시청 화폐가 안 날려요. 음, 왜냐하면, 이제 그 남포동 시청 앞에 예, 그 동아대 학생들이 어디서 스크럼을 짜냐 그러면은 구두부 농장에서부터 스크럼을 안 짭니다.
음, 그 충무동 그 지금 충무 초등학교, 그 옛날에는 충무동 거기가 그 복개천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스크럼을 짜고 부산역까지 더 올라가 가지고 1차. 그러니까 이제 부산 시청까지 한 16년 종도 뭐 30년 종대로 막 차고 막 독재 타도 막 유신 철패 앞서 막 옵니다. 그럼 어디서 걸리냐면은 그 남포는 파주소.
음, 나무 파주소, 예, 나무 파주소 극장 있고 옛날에 동민 장이었어요. 그게 그 남포 파주소가 아마 우리 부산에서 가장 많이 순환을 당했던지데, 그 철조망을 다 지어놨거든. 이렇게 철망을 다 지났습니다.
그, 그 맨날 그 순경들은 아마 가위 눌렸을 거야 아마. 음, 뭐 학자들이 와서 활병 던지고 막 난리 지었어요. 어, 그때 활병 막 던졌어요.
학생들은 막 돌멩이 막 던졌어요.그 신문에 그때 막 방송 안 되는지 몰라도 막 내가 볼 때는 막 거기 막 불인가 불이 어째서 일어났지 모르는데 화염병이지 뭐 하튼 막 던지면 안에서 매한 냄새가 나고 막 돌 던지고 이랬어요. 화염병 던지오셨는가 아데, 하염병인지 아닌지 확실히 기억 못하겠는데 거기 연기 같은 게 막 나는 걸 봐서는. 근데 거기 철망이 들리지 있으니까 앞에 철망이 있으니까 순경들 안에 공포에 떨고, 음, 근데 버스에 탄 우리, 우리 나는 개군이지만은, 음, 불안이 죽긴 거야, 순간적으로.
시민들이 내를 두드려 패지 않는 군복 걸으니까 막. 미치겠는 거야, 아 정말 막 진짜 힘듭니다. 그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그러면 남포 파주소 앞에서 와서, 시청 앞에서 막 뭐, 시청 앞에 장갑차가 있었나, 하여튼 제무시 막 이런 게 있어 가지고 1차 충돌이 됩니다. 충돌이 되는데 학생들이 다 다 숨막 다다 쫓겨가요. 좀 막 어지럽습니다, 점다 막 영도다리 쪽으로, 대신호 쪽으로 또 도로 이쪽으로.
그러면 그 아들이 어디로 가냐 하면 서면 보이거든요. 그럼 서면에서는 누가 오냐 그러면 동의대, 부산대, 부산 여자대학교, 지금은 신라 대학이고, 부산 여자대학교, 사람들이 양정을 통과해서 오던 말입니다. 그러면 양정을 넘어오기 전에 어디서 가냐 하면 연산 노타이 있죠.
연산도 부산 시청 자리, 거기 이제 그 중간에 있단 말입니다. 거기가 군수기지 사령부 있어요. 거기는 이제 장갑차도 앞에 딱 서가 있고 이러니까, 거기는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양정 양정을 해서 서면로 통과, 바로 통과 자아요. 송상현 공, 그때 뭐 송상현 거기 없으니까 그냥 통과하는데, 그리가 서면서 붙는데, 나도 개이음, 아 나도 내가 나쁜짓 했던 안 했던 간 무난하고, 나도 그 당시 현정권의 하수인이었고, 나도 현정권의 경근이었고, 나도 그 사람들한테 욕을 했고, 그 사람들을 삼촌 교육 시켰고, 그중에 적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었다 이거. 그렇지만 나는 그걸 다 명령이라고 생각하군요, 군인은 명령을 받아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죄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돌 던질 때 하나라도 사람들을 좀 이제 구해 줘야 되겠다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남포동에서 학생들, 그 신에서 오는 학생들 데리고 차 태워 가지고, 같이 내 보호 아래 데리고 갔던 거.
그다음에 삼촌 교회에서 나와서, 나는 부산 시민이기 때문에 자기들하고 마주할 거 아니에요. 저도 부산 사람들이 다 거야 되니까, 어쨌든간에 많이 풀어주는 게 내 업무였고, 그렇지만은 그중에서도 나는 안 풀어주고 나는 잡혀 갔지, 절마 저것때문에 내가 잡혀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 나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돌 던지라고, 나는 기꺼이 맞겠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대학을 다니면서, 계엄 때 독례를 다니면서, 그 학생들한테 학생들이 나한테 돌 던지고 내 오토바이를 칼로 찍고, 막 부수고 이할 때도, 그거는 나는 받아들였어요. 당연하다고, 어 그럼 왜냐하면 나는 그랬을 거야.
만약에 내가 그 당시 학생이었으면 나는 더 해지고 싶어. 나는 울분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 오토바이를 칼로 찍는 게 워토바이 부수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빙산의 일각, 뭐 참 태산 준동에 서일 필요라고 조만한 거고, 그 큰 벽을 넘기에는 나는 너무 힘들었으니까, 나는 그 당시에 뭐 대일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최선은 그거밖에 없었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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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문효중 박사와 학생들의 기억(부마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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