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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님을 소개합니다.

by 나는기사가진컴맹 2024. 11. 12.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대한제국 시절에는 개화파 정치인으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을 지냈다.

당시 독립운동사에서 좌우 양 진영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평판이 좋은 독립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 시기인 1920년대 초반 '민족 개량주의', '자치론'이 나돌면서 주요 독립 운동 세력들 간 좌우파가 심하게 갈라지고 충돌할 때 유일하게 양쪽에서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제시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노구를 이끌고 좌우를 중재해 하나로 만든 인물이었는데, 1924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사장으로 추대되었던 것과 1927년 좌우익 연합 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근엄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충청도 출신 특유의 유머감각을 살린 직설화법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850년 10월 26일, 충청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종9품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을 지낸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이희택(李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7년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개화파 박정양의 식객(食客)이 됐다. 박정양보다 8살 연하의 이상재는 처음에 나라의 여러 부패 문제 등을 두고 울분을 토하다 차츰 박정양의 신문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박정양은 1866년 과거에 합격해 막 승지일을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1880년까지 박정양의 옆에서 비서 아닌 비서로서 모시던 이상재는 박정양이 1881년 '조사시찰단'[3]으로 도일하자 같이 일본에 갔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들이 모두 실각했는데 김옥균의 당여인 급진 개화파들은 일소됐지만 갑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개화당 인사들까지 모두 찍혔다. 당시 박정양은 한성부 좌윤(오늘날 서울특별시 부시장)을 거쳐 도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랐었는데 고종을 김옥균 파에게 일시적이나마 뺏겼던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상재 역시 서천으로 낙향했다. 조정이 민씨 척족 등의 수구파 일색이 된 후에야 온건 개화파들이 조금씩 복귀할 수 있었다. 온건 개화파들은 구한말 국정에 참여는 했지만 청나라 양무운동 방식의 근대화를 밀어붙인 민씨 척족들과는 궤가 다르며 그들에게 눌려 있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에 재기용되자 박정양을 따라 그도 젊은 시절 미국에 가서 공사관 2등 서기관에 올라 첫 관직 생활을 경험했다. 그러나 박정양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는데 조선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막기 위해 모든 대미 접촉을 청나라를 통해 하라는 약속(영약삼단)을 깨고 박정양이 미국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때 귀국한 이상재는 다시 실각한 박정양 옆에서 야인 생활을 버텼다.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가 쫓겨가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하자 박정양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갑오개혁 때 이상재는 학무국장 겸 학무아문 참의로서 '신교육령'을 반포시켰으나 갑오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1895년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러시아 뤼순항과 요동 지배권을 뺏기자 고종의 마음이 러시아로 기울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급진 개화파들은 죽거나[4] 다시 일본 망명길에 올랐지만 이상재를 비롯한 온건 개화파들은 수구당과 손을 잡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힘을 보탠다. 그는 이 때 중추원 1등 의관,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냈고 1896년 독립협회 출범 때는 물론 1898년 3월 '만민 공동회'와 10월 '관민 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꾀하고 있다'는 어용 단체 황국협회의 무고(익명서 사건)로 남궁억 등 16명과 함께 1898년 11월 체포되었다. 이 때 이승만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 가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 이승인과 함께 3년형을 사는 동안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후 이승인이 옥 중에서 사망하는데 이 때 이승만이 준 성경을 읽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에 원한맺힌 마음을 푼다. 이승만과는 이 때부터 사제 지간이 됐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풀려나 곧바로 낙향한 그는 고향에 초갓집 교회를 열었고 '조선 기독교 청년회(YMCA)'에도 참여해 기독교 운동에 매진한다.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 방한하자 맞이하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미국에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인 필리핀의 지배와 북태평양 제해권을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본과 동맹한 상태였다. 을사조약을 지켜본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잠시 의정부 참찬을 맡지만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이 때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스승이면서 선배인 박정양의 죽음을 맞아 큰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1906년 조선에 은혜를 입은 일본인 소다 가이치를 기독교인이 되도록 전도하고 소다 가이치는 훗날 조선 아이들을 돌보고 조선의 독립 운동을 도우며 미쳐가는 자국에 맞서 조국의 악행을 회개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 치하가 되자 관직을 버리지 않은 자들은 과거 친일 개화파였든 수구파였든 누구든 친일파로 변질되는데 이상재는 양심 인사로서 일체의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한다. 그러면서 그는 계몽 활동에 나서 교육자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상재는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었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으며 1923년 현재의 보이스카우트 전신(前身)격인 '소년 연합 척후대'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부임하였으나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항일운동단체였던 신간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한달 뒤인 1927년 3월,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열렸는데, 4남 중 3남이 모두 이상재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5],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아들 이승준이 상주(喪主)를 맡았으며, 유산으로는 미곡 27가마의 빚을 남겼다고 한다. 묘지는 처음에는 고향인 한산군 선여에 장지를 마련했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했다. 묘비는 변영로가 직접 썼다.

1927년, 병환으로 별세했을 때 장례식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을 뿐 아니라 무려 246개의 단체가 참여했고, 상여를 멘 단체 수만도 136개에 달했다. 장의 위원장은 윤치호가 맡았으며 경찰의 삼엄한 경계속에서도 무려 20만의 조문객들이 모였다.[6]

더구나 한국사회 전 계층이 참여한 사실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데, 교회와 상업계, 교육계는 두말할 것 없고 인력거 조합, 기생단, 이발직 친목회, 배달직공 친목회 등 각양각색의 집단들이 한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상하 계층의 구분 없이 모든 이들과 어울렸던 이상재의 삶은 장례식 한 장면으로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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