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역사의 반복된다고 하죠? 그것도 좋은것보단 악습들... 지금 정권을 보면 이승만 시대가 보여요
이승만 정권과 그 정치적 동맹자인 한민당은 민중이 요구하는 개혁적 조치들을 시행할 생각이나 의지가 없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서는 친일파 정당이란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던 한민당 뿐만 아니라 친일 경찰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도 강력히 반대했다. 남한 내부 사회의 정치적 안정과 관련해서는 민심을 얻음으로써 경쟁자인 좌익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아예 배제한 채 오직 경찰력과 물리력으로써 탄압을 통해 와해시키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오직 남한 사회의 안정은 반공국가 건설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를 위한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특히 여순 사건 이후 국가보안법 제정, 국민보도연맹 결성, 청년단 통합과 일원화 및 준군사조직화, 학도호국단 등 학생들의 동원체제 정비, 반공 캠페인과 주민 감시체계의 강화 등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 일색의 경직된 사회로 만들었다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이념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하였다. 1949년 4월 이승만은
“하나의 백성”(一民)으로서 함께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공산주의를 배척하자며 ‘일민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일민주의가 “신흥국가의 국시(國是)”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민주의는 정리된 이념이 아니었고 체계적인 내용도 마련되지 않았다. 단지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하나의 유일당 혹은 국민의 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일민주의’로 표현한 것이었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이승만의 초기 이데올로그로 활약했던 양우정 등이 일민주의를 이론화하고 보급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일민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특정세력의 계급독재를 옹호하는 반(反)민족적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대한민국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 개혁을 통해 양자를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일민주의는 점차 친자본주의, 친미적인 내용으로 바뀌었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지도자를 강조하면서 반공파시즘, 국가주의로 변질되고, 이승만 우상화, 이승만 독재 정치를 위한 이데올로기 도구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자신이 국부(國父)로 추앙되고,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사심이 있는 당파, 그래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한편, 이승만과 한민당은 대부분의 정책에서 일치했지만 농지개혁에서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미군정 시기부터 농지개혁에 대해 제동을 걸었던 한민당과 그 뒤를 이은 민국당은 정부 수립 후에도 과거의 입장을 바꾸지 않은 채 지주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이승만의 입장은 달랐다. 지주적 이해가 없었고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기 원했던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기 위해 미군정이 농지개혁을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승만이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한민당의 반동적인 농지개혁 기도를 막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깊은 정치적 의도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농지개혁 과정에서 농민들의 인기를 얻은 조봉암은 이후 진보적인 야당의 정치거물로 성장, 이승만의 정적으로까지 발전했으나 1950년대 후반 결국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법적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농지개혁법안은 논란 끝에 1949년 6월 21일 국회를 통과했으나 1950년 3월 일부내용 개정과 함께 최종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농지개혁법은 처음 조봉암의 농림부 안과 기획처안(정부공식안), 그리고 민국당이 주도한 국회 산업위원회안을 절충한 것이었는데, 자본주의적 방식으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이었다. 남한의 농지개혁이 개혁적이었던 것은 농지개혁에 대한 이승만의 적극성, 조봉암의 강한 민국당 견제, 농민과 사회적 여론의 압박, 북한 토지개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한계와 문제점이 없지 않았으나 한국 사회의 반봉건적 소작제도의 해체와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농민적 토지소유의 확립, 일부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통한 자본주의 발전에 참여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주계급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산업자본으로 전화하는데 실패하고 몰락하였으며, 이는 지주계급을 기반으로 했던 민국당(한민당)의 물질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군부숙정처럼 농지개혁법 통과(전쟁 발발로 경남 일대를 제외하고 전국적인 본격 시행은 전쟁이 끝난 뒤 이뤄짐)도 한국전쟁에서 한국정부의 유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전에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지 않았더라면 한국 민중의 남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훨씬 미약했고 남한 정권의 정치적 기반도 그만큼 취약했을 것이다.
농지개혁 문제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한민당(민국당)의 정치, 사회 정책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이승만과 한민당은 통일문제에서도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힘으로 상대를 압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력통일 방안이었고, 이승만은 이를 ‘북진통일’이란 선동적인 구호와 결합해 표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북조선에서는 통일방안으로 ‘국토완정론’을 들고 나왔다. 본격적으로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무력공격을 통해 제거하겠다는 사고가 등장한 것이다.
정부 수립 준비과정과 그 후 북조선은 정치역량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1948년 8월 조선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때부터 상부는 사실상 통합되었다. 1949년 6월 30일 북로당과 남로당은 정식으로 통합되어 조선노동당으로 발전, 출범했다. 남북노동당 통합 과정에서 정부 수립 때 내각에서 소외된 소련파와 남로당이 자기 몫을 충분히 챙기는 바람에 김일성의 지위는 북로당 시절보다 훨씬 약화되었다. 1949년 9월 24일에 열린 북로당 제3차 회의에서 소련계가 약진했고, 당조직 부장을 맡고 있던 허가이가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사실상 당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위원장인 김일성은 내각 수상을 맡고 있었으므로 누군가는 당을 관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주18) 소련계가 당의 중추를 장악한 것은 이들이 북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당의 실무경험을 가진 집단이었고, 내각으로 우수한 인력이 빠져나갔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노동당의 합당에서 박헌영의 남로당계열을 견제하려는 김일성이 의도가 작용한 탓이었다.(주19)
남북노동당의 합당은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통합한 성격이 강했다. 1949년 합당 당시 북로당은 북한지역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한 명실상부 전위조직이었던 반면, 남로당 조직은 큰 타격을 입어 남한지역에서 거의 궤멸상태로 지하지도부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노동당의 출범으로 남북의 공산주의 정치역량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단일지도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보면 해방공간에서 형성되었던 남한혁명세력의 몰락과 남한혁명운동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노동당은 단일지도체제가 되기는 했지만 당 내부에서 유일적 지도가 실현되지 못하는 파벌연합적 성격이 존재하였다. 결국 이는 후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노당의 숙청과 종파투쟁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주20)
남북노동당의 통합과 함께 남북 민전의 통합에도 착수하였다. 1949년 6월 26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과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하나로 통합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을 결성하였다. 조국전선은 남북에 존재하던 모든 정치적 역량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로 남한을 겨냥한 것이었다. 조국전선은 결성 직후인 1949년 6월 말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방안을 제기하는가 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7일에는 남북 간의 최고입법기관 준비 선거를 위해 남북제정당사회단체협의회를 개최하자고 평화공세를 펴기도 했다.
전쟁 전야: 남북의 무력 충돌 격화와 북조선의 군사력 강화
1948년부터 38선 경비를 남북 양측 모두 미군과 소련군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으로 넘겨주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남측 38선 경비를 점차 한국군이 넘겨받기 시작했다. 38선 북측도 인민군이 넘겨받기 시작해 1948년 말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인민군이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1949년 1월부터 양측 군대의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어떤 때는 대대급 전투로까지 확대되었고, 비행기가 뜨고 함정이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될 때까지 38선에서 874회나 교전이 벌어졌다. 매일 두 번 이상의 충돌이 벌어진 셈이다. 이 같은 교전상태는 전면전이 아니었을 뿐 전쟁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주21) 이 상황을 연구자들은 ‘작은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북 간의 교전이 곧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같은 충돌은 남북 간의 대결이 무력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분명했다. 일반국민들까지도 늘 언제 전면전이 터질지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38선을 사이에 둔 남북 군대 사이에 첫 대규모 교전이 벌어진 것은 1949년 5월이었다. 이후 1949년 가을까지 전투가 더욱 빈번해졌다. 양측의 38선 충돌은 북조선의 게릴라 남파와 연계되어 벌어졌다. 남로당이 내려 보내는 무장 게릴라의 활동과 맞물려 38선의 전투가 격화된 것이다. 38선의 충돌과 교전은 남북한 쌍방이 서로 도발했다. 객관적으로 공격의 횟수는 쌍방이 비슷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남한측이, 어느 지역에서는 북조선측이 더 많았다. 초기에는 남한이 좀더 공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북조선측이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북한이 더 공격적이 된 것은 남한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게릴라 투쟁을 도와주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 38선 충돌은 황해도 옹진반도에서부터 강원도 양양까지 38선 전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니었다. ‘작은’ 전쟁이었다.(주22)
38선을 둘러싼 남북 군대 사이의 교전은 1949년 가을을 고비로 점차 줄어들었다. 1950년에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는 남에서 벌어지고 있던 게릴라 투쟁과 관련이 있었다. 북에서 남파된 게릴라 역량은 1949년 9월 절정에 달했다. 남한 게릴라들은 정규군 편제인 병단으로 재편되었고, 그 아래 대대, 중대, 소대, 분대 등 군대 편제까지 갖추고 활동했다. 1949년 가을 남한 게릴라는 총력을 기울여 공격을 감행했다. ‘아성공격(牙城攻擊)’으로 불리는 행정중심지의 관공서 및 주요 시설물에 대한 공격과 파괴 등이 잇따랐다. 남한 정부는 게릴라의 공격에 크게 위협받았다.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 일부 산악지역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위협했다. 그러나 1949년 겨울에서 1950년 봄 사이 겨울에 남한 군경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남한 게릴라는 많은 부분 전투력을 상실했다. 1950년 봄 이후 남한에서의 게릴라 투쟁은 활발하지 못했다. 이 무렵에는 38선에서의 교전이 뜸해지고 소강상태를 유지했다.(주23)
1949년 가을부터 1950년 봄 사이에 산악지역에서 대대적인 게릴라 토벌작전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마을 지역에서는 좌익 검거 작전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좌익조직의 파괴 과정에는 국민보도연맹이 중요한 역할이 담당했다. 정부당국은 관제조직으로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30만 명 이상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있던 국민보도연맹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좌익조직원 색출 작업에 나섰다. 경찰과 검찰은 보도연맹원들에게 과거의 활동에 대한 확실한 전향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동지를 배신하고 그 명단을 제출할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남로당 등 좌익조직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남로당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정부당국의 공세로 수많은 좌익들이 전향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익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그 정보는 조직파괴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조직 활동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직원들은 지하로 들어가 잠복하거나 점조직 형태로 최소한의 연락관계만 가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1950년 3월 말 남로당 지하당 총책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검거되면서 무너졌다. 남로당 조직은 완전히 무너졌다.(주24)
이승만 정권은 1949년과 1950년 초에 걸친 북조선 군대의 38선 공격과 남파 게릴라의 남한 내부 무장투쟁, 좌익의 공세 등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1949년 가을에서 1950년 봄 사이 게릴라 토벌작전의 성공, 남한 내부 좌익조직의 파괴 등을 통해 안정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 정권의 기반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좌익의 공세가 약화되자 다시 이승만과 민국당(한민당)의 지배연합이 분열하였고, 1950년의 5.30 2대 총선에서 남북협상파와 중간파 정치세력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근본적인 위협은 북조선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1949년부터 38선에서 남북 군대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남한 내부에서는 남파 게릴라의 투쟁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남과 북은 북진통일과 국토완정을 주장하며 무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군사적 준비는 남한에 비해 북조선이 앞섰다. 군대의 숫자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북조선은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여파가 고스란히 북조선까지 전해졌다. 북조선 사회는 중국혁명의 승리로 한층 자신감이 배가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국 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 병사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북조선 인민군의 전투력이 한층 배가되었다는 사실이다. 1949년 여름과 1950년 봄에 북한으로 들어온 조선인 부대원의 규모는 5만여명이었다. 이 부대들은 각각 조선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 그리고 18연대(4사단)로 개편되었다. 1960년 6월 25일 아침 38선에서 남진한 북조선 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47%인 10개 연대가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 부대였다. 이 조선인 부대는 전투력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49〜1950년 사이에 중국에서 북조선으로 전입한 부대는 그 용감성으로 인해 중국내전 기간 중 큰 명성을 얻었는데, 항상 중국군의 선두에서 돌격로를 열고 전투의 대세를 결정했으며 1개 소대로 1개 대대를 포로로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1948년의 장춘·사평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 연구가 장준익은 당시 남진했던 여타 인민군 부대의 전투력을 1로 평가할 때 중국에서 입북한 조선인 사단은 1.5로, 인민군 예비사단은 0.5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주25)
중국 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부대의 입북은 북조선 인민군의 전투력과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으며 이는 무력으로 남한을 완정하겠다는 김일성·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의 의지를 불타오르게 한 자극제가 되었다. 김구가 남한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된 순간 김일성으로서는 무력공격을 포기해야 할 명분도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혁명의 성공과 조선인 부대의 입북, 그리고 남한의 혼란과 북조선 사회의 발전으로 넘치는 자신감을 갖게 된 북조선 지도부는 무력전쟁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반에 걸쳐 북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군사적 급진주의’가 팽배하였다. 이것은 전면적인 전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의 태평양과 극동지역 방위선을 밝힌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제외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애치슨 라인이 북조선 지도부에게 한반도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안겨준 것은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었다. 애치선은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였다. 이때 태평양에서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애치선 라인’도 함께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라인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또한 북한 지도부에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한반도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잘못된 신호였지만, 한국전쟁 발발에 한 요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조선 인민군의 전면 공격과 남진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달라진건 반공의 자리에 뉴라이트를 넣으면 될 것이다. 이 정권은 또한 극우 단체들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의 반복 맞지요?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