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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넘는 역사! 국내 최고의 NGO 단체, 흥사단을 아시나요?

by 나는기사가진컴맹 2024. 12. 8.

흥사단(興士團)은 안창호(安昌浩)가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창단 이후 흥사단은 미국 LA에 본부를 두고, 중국 상해에 원동위원부를 설립하여 활동 영역을 넓혔다. 국내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서울에 수양동맹회(1922), 평양에 동우구락부(1923)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로 통합하였고 1929년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1937년 일제가 일으킨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많은 단원이 투옥되고 동우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흥사단 본부가 있는 미주지역에서 흥사단을 굳건히 지키면서 해방 이후 국내에 조직이 재건되었다. 현재 흥사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비정부기구로서 여전히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흥사단의 창단과 중국에서의 활동

흥사단(興士團)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창립에 간여하였던 1907년에 결성된 애국계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와 그 산하 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설립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1909년 청년학우회 조직을 이끌었던 안창호는 1912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먼저 여러 갈래로 존립하고 있던 교민단체들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통합하여 미주지역 동포들의 결속을 다졌다. 그런 다음 그는 청년학우회 결성의 취지를 이어서 민족운동에 투신할 청년 지도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이라는 민족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흥사단의 창립은 1913년 5월 13일 안창호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경기도의 홍언(洪焉)·강원도의 염만석(廉萬石)·충청도의 조병옥(趙炳玉)·전라도의 정원도(鄭源道)·경상도의 송종익(宋鍾翊)·평안도의 강영소(姜永韶)·함경도의 김종림(金宗林)·황해도의 민찬호(閔燦鎬) 등 8도 출신의 대표를 포함한 25명으로 구성된 창립위원으로 하여 흥사단이 탄생하였다.

 

흥사단은 1915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두고, 3.1운동 이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과 조직을 확보하고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 1월 중국 상하이 흥사단 단우회는 미주지역에서 온 김병연(金秉瑌)・박선(朴宣)·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조직하고 단소(團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무렵 김여제(金與濟)·박현환(朴賢煥)·안국형(安國衡)·주요한(朱曜翰)・이광수(李光洙)・백영엽(白永燁)·이용설(李容卨)·차이석(車利錫)·선우훈(鮮于燻) 등이 입단하면서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정식으로 원동위원부가 설립되었다.

 

안창호는 1924년 이른바 갑자논설(甲子論說)로 알려진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고, 중국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건립하여 구국을 위한 교육과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그는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한 토지를 물색하던 중 1931년 드디어 난징에 용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투탄 의거를 계기로 일제 경찰의 단속으로 체포되어 그가 국내로 압송됨으로써 이상촌 건설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흥사단의 국내 활동

국내에서는 1922년 2월 12일 서울에서 이광수(李光洙)와 김태진(金泰鎭)·김항주·박현환 등이 동지를 규합하여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창설 목적과 이념, 조직 구성 등은 흥사단과 같았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흥사단과는 별개의 단체인 것처럼 ‘수양동맹’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듬해인 1923년 1월 16일에는 평양에서 김병연을 비롯하여 김동원(金東元)·김성업(金性業)·조명식(趙明植) 등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국내에는 2개의 흥사단 조직이 탄생하였다.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는 1925년 회합을 갖고 두 조직을 통합하기로 결의하였고, 1926년 1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라는 명칭의 단체로 통합하였다. 단체의 명칭은 두 단체의 앞 글자인 ‘수양’과 ‘동우’를 따서 조합한 것이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기관지 「동광(東光)」을 창간하는 등 민족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1929년에는 수양동우회에서 ‘동우회(同友會)’로 개칭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변절

1930년대는 흥사단에 고난과 시련의 시기였다. 당시 군국주의 전쟁으로 치닫던 일제는 1937년 6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딱 한 달 전 국내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궁극적으로 소멸하기 위해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이때 일제가 일으킨 소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인하여 국내의 흥사단 조직은 일대 타격을 입고 활동이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사건에 연루된 70여 명의 흥사단원을 비롯해 181명이 투옥되었고, 동우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 바람에 국내 흥사단 운동은 활동을 시작한 지 15년 만에 중단되었다.

 

이 시기 안창호는 1932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이래 대전형무소에서 이미 2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가출옥한 상태였다. 그는 평양 서쪽의 대보산(大寶山)에서 은거 중이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나자 또다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구금되었다. 앞서 옥고를 치르면서 이미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허약해진 육신이 투옥 중 병세가 깊어지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38년 3월 10일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안창호가 별세한 이후에도 흥사단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우선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단원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5년여에 걸쳐 차례로 석방되었다. 이로 인해 흥사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재개하는데도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제의 탄압이 극성을 이루던 시기, 흥사단의 가장 큰 위기이자 비극은 일부 단원의 변절과 전향이었다. 1938년 8월 18일 흥사단은 예비 단우(團友) 5명과 통상 단우 8명에 대한 제적 및 출단을 단행하였다. 이들 13명은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여 반민족행위에 동참하는 등 해단(害團)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일제의 탄압과 회유 공작이 더욱 극렬해지면서 적지 않은 흥사단원이 동요하고 변절을 한 사실은 흥사단으로서도 치욕일 뿐만 아니라 민족사의 비극이었다.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에 전향한 변절한 인물 중 이광수와 정인과, 주요한이 대표적이다. 이광수는 한때 기미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되었던 도쿄 2.8독립선언문을 집필한 재일 유학생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정인과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외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고 193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까지 지냈던 종교인이었다. 또한 주요한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라는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이들 모두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예심(豫審) 과정에서 변절하고 전향을 선언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 이후 국내의 흥사단 조직은 비록 와해하였지만,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미주지역과 원동지역의 단원들은 흥사단을 굳건히 지키면서 보전하기에 힘썼다. 그 결과 해방 이후 흥사단은 재건되었고 대한민국에서 백 년이 넘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NGO(비정부기구)로서 현재도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출처:지역N문화 국난극복, 자주독립을 위한 함성,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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