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0 무장독립운동단 청산리 대첩은 대한군정서 및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 부대가 힘을 모아 합동작전을 펼쳤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큰 전투입니다.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국외에서 독립투쟁을 활발히전개하였습니다. 대한군정서는 이 시기에 만주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을 주축으로 훈련을 하며 항일투쟁을 준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북로군정서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또 하나의 주력부대는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의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단, 한민회, 광복단, 의민단, 신민단 등의 단체들이 연합한 부대였습니다.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1920년 독립군 토벌작전을 계획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피로 지켜진.. 2024. 11. 22. 김구를 심문하는 등 이견의 여지가 없는 유명한 친일파 김씨 성을 가진 여자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김윤정이런 친일파가 있었다니 놀라웠다.전라남도 참여관경기도 참여관충청북도지사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하였는데, 친일파 청산이 안됐던 이유도 여기 있으리라... 이 당시 남한의 기득권들이 지금 들고 일어나나부다... 당시의 후손들이...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그해 귀국했다.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2024. 11. 21. 기무사령부의 전신, CIC 와, 나는 여자인데 이런 얘기에 너무 관심있어. 전쟁과 평화, 군대이야기, 여군으로 갔어야 했나봐 ㅜㅜ 한국 기무사령부의 변천 과정 1948년 5월 27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Special Investigation Section)로 창설1948년 11월 1일: 특별정보대(Special Intelligence Service)로 개칭1949년 10월: 제2과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로 개칭1950년 10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특무부대(Special Operation Unit) 설치, '1348부대'로 불림1960년: 4·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로 개칭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1977년: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1991년: '국군기.. 2024. 11. 20. 1904년 일제의 군사경찰제도 (대한방침)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승리함으로써 청나라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선은 일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일전쟁 직후 삼국 간섭 때부터 등장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조선이 이와 같이 배일친러정책을 표방하자, 일제로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일전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 · 미의 지지 하에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한국주차헌병대 일제 헌병의 조선.. 2024. 11. 19. 이전 1 2 3 4 5 6 ··· 8 다음